어떤 안타까움 / 淸草배창호
자연이야 늘 그 자리를 맴돌듯이 우직하게 한결같지만,
세상은 하루가 멀다 하여 변하기에 여념이 없어
실로 따라잡을 수 없는 가당찮은 현실이고 세계사의 추세이다.
변하는 만큼 그에 상응하는 대처가 따라주질 못하고 있으니
부작용과 조악한 임시방편이 남발과 양산이라는
위험천만의 가교역할을 하고 있을 뿐
이것은 아닌데, 하는 안타까움이 곳곳마다 문전성시를 이룬다.
문명이 발달하다 보니 실시간 이슈를 클릭 한번으로 접하고,
예전에는 지필묵으로 대신한
원고지에 아니면 누런 등사판 16절지에 연필이나 잉크 펜으로 휘갈겨 썼고,
지금은 컴퓨터의 자판 위에
손사랫짓 하듯이 뚜드리니 하 시절이 절로 실감난다.
호롱(호야)불과 귀한 촛불 아래서 앉은뱅이책상에 엎드린 엊그제,
가가 호수마다 30촉 전구를 필요한 시간에만 아껴 켰었는데
몰래 60촉을 밝혀 썼던 그 시절도 추억처럼 아련하고
보고 싶어도 볼 책이 없어서
활자가 박힌 쪼가리라면 무엇이든 읽었던 옛 시절,
시詩 한 편 암송이 가슴 뭉클했던 향수가 찡하게 목울대를 넘나든다.
물질문명으로 풍족한 이 시대의 실상은 어떠한가?
천양지차가 홍수처럼 급류에 터져버린 둑과 같아서
얻음과 잃음이 다 우리(自尊) 안에 있는데,
포용이란 이 시대의 절절한 갈증은 차마 외면한 채,
아집으로 똘똘 위선의 인성으로 굳어가고
한때 샛별처럼 초롱 했던 그 감성들이 유성처럼 사라졌으니..
거르지 아니한 인내의 한계인가
조급한 심상들이 위태로움을 더하게 한다.
곳곳에 뿌리박혀있는
권위만을 생각하고 원칙이란 사념들을 도외시하고 있으니
마음으로 우러난 승복이란 정녕 있을 수가 없다.
“소탐대실” 작은 이익에 얽매이다 보니 큰 성취를 볼 수 없음이고
성찰보다는 이기적인 지배가 우선하니 숙성하는 참의 뜻이
뒤 안의 사장 길로 내몰렸으니 이 시대의 안타까움이 아니고 무엇이랴.
어느 곳을 둘러보고 돌아보아도,
대문은 그럴 듯 하고 이름은 묵직하고 외양이야 화려해 보이지만,
조금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들 왜 그렇게도 이름값을 못하는지?
아마도 원칙이라는 소신과 올바름이란 척도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반칙과 변칙이,
이분법이란 허울 좋은 잣대 아래 당연한 것인 듯 활개치고 있으니
참으로 이 시대의 병폐가 아니고 무엇일까?
소통이란,
인간으로서 최고가치의 꽃이기에 소신所信있는 글쟁이의 본분으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가꾸고 스스로 정화의 꽃으로 키워서
위상에 걸맞은 가치가 용틀임처럼 활짝 피어나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