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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의향기/♧좋은 글(모음)

시인의 아픔 / 청목 유은하 (옮긴 글)

by 淸草배창호 2019. 4. 25.

시인의 아픔

 

-유은하-

시를 쓴다는 사람으로 오늘 날 시가 읽혀지고 있지 않는 안타까움에 이시대의 시인들에게

심각한 책임을 고민해 보자고 감히 이글을 쓴다.

무수한 책들이 출판되고 있지만 거의가 번역본 자기개발 책에 밀려나 있고

가끔씩 유명세에 있는 작가들의 소설도 시판의 10%도 차지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나마 시집을 고르는 독자는 거의 없다는 현실에서

시를 쓴다는 사람으로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측면에 문제점이 있다고 여긴다.

 

칠팔십 년도까지만 하더라도 시를 읽는 독자층이 적지 않았었는데

왜 시를 읽는 독자들이 사라진 것일까?

시의 특성상 감정의 고조를 요구하기 때문에 간편 문화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심오한 생각을 거부 한다는 것도 있지만

독자들의 시에 대한 이해를 쉽게 돕지 못하는 시인들의 창작 감각에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누구나 별 돈 들이지 않아도 자신의 시를 책으로 발간 할 수 있다는데 대해서

막을 권리도 없지만 시를 쓰는 작가가 독자에 대하여 무책임 하고 함량미달의 시 지식으로

출판을 하는 자태가 시의 독자를 등 돌리게 한 큰 이유라고 본다.

주제넘고 건방진 생각이라고 치부 될망정 시를 쓰는 사람으로 분명한 소신을 밝히고자 한다.

 

시란 상식적인 개념에서 장단편의 드라마를 함축적으로 표현해 내기도 하고

사물을 예리한 시각으로 직시해 느낌을 글로 표출하지만

인간적인 본연의 감성을 민감하게 자극하는 작가의 능력이 중요하다.

아름다운 시어들을 줄줄이 나열해가면서도

작가가 의도하는 테마가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무슨 감동이 있겠으며

더구나 시 속에 메시지도 없고

결론이 애매하다면 독자는 무엇을 기억하겠는가 생각해 봐야 한다.

 

물론 독자의 몫으로 남겨 놓은 여운도 시적 기교지만

그런 경우라도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도록 유도해야 하고 기억에 남게 해야 한다.

형식에 묶여진 문체나 표현이 아니더라도

시의 전개적인 상식을 벗어나 작가의 감정집약만 되어서는 아니 된다.

시어나 문장 대하여 신중한 고민도 해야겠지만 단어가 적은 한글의 특성상 표절에 주의해야 한다.

작가는 자신은 표절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시어는 한정된 퍼즐과도 같아서

자칫하면 표절로 오해가 되기 때문에 시를 쓰는 것보다 많은 시를 읽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시학이란 학문이 있어 많은 학자들이 심오한 연구로 시 발전에 기여하고 있지만

지극히 일반적인 이해에 불가한 것이고

작가들의 다듬어진 감성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를 학문적으로 간결하게 요약해 보면

형식, 내용, 문학개념, 시대적으로 구분하고 있지만

우리 시의 변천사는 시대적인 이슈에 대부분 국한되고 말았다.

 

근대시에서 1910년을 분기점으로 1940년대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시들의 대부분이 들어있는데

한일합방에서 독립까지 일제 강점기에 작가들의 시가 대부분이다.

이런 이유는 애국애족의 사상적 의미와 계몽에 집중된 교육의 탓이었고

이후 1960~1980년까지 정치적 강압과 속박에서 써진 저항시가 출현하게 되는데

이것도 시대적 이슈의 맥락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시란 시인들의 고뇌에서 잉태되는 것이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속박 속에서 나오는 신음일 수도 있지만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감성으로 시가 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즘 부르는 노래가사를 보면 여전히 깊은 시적 감성이 담아져 있다.

하지만 음률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리듬과 기교로 노래하고 있다.

 

나 역시도 썩 구식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지금도 키타를 퉁기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을 정도인데 요즘아이들은 쉽게도 익히고 있다.

역사 이래 최고의 문명을 누리고 있는 현대인들의 3차원의 두뇌에 맞추어

문학도 변해야 하지만 시의 본질은 인간의 공통적 내면의식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런 시대의 정서에 맞추어서 차원 높은 시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과할 만큼 멋만 부리고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와 축소에 중점을 두고

상징적 기교를 지나치게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다.

시란 함축성과 동시에 입체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변형도 가능하겠지만

시의 본연적 가치를 상실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솔직히 시를 쓴다는 사람도 작가의 뜻한 바를 이해 할 수 없는데

보통의 독자들이 시에 대하여 어떤 공감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는 염려를 감출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시를 어렵게만 인식하는 독자의 손에서

시집을 기대한다는 것은 더욱 희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작가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개인적 감정에만 몰입한 창작은

작가에게는 명작이지만 독자에게는 외면당하는 시가 되고 만다.

독자의 감정에 민첩하게 접근해가는 방향으로 시의 진가가 발휘 되어야 한다고 본다.

작가의 시상과 독자의 감정이 공감 될 때 시에 감동할 수 있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최고의 문학이다.

 

문학의 차원 높은 지성을 다루는 시인들의 의식관 또한 의아해진다.

시를 쓰는데 작가의 신상이 어디에 쓰는 물건이고

등단이니 저작이니 따위가 무슨 소용이냐고 묻고 싶다.

시를 쓴다는 사람에게 과연 케리어가 필요한 것인가?

신인이니 기성이니 하는 것으로 보아 시에도 기득권이 있나 본데....

정말 어이없는 장단에 춤을 추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들의 양심이어야 한다면 펜의 위대한 힘을 모독하는 것이다.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 극소수인데

그 중 한사람으로 명성과 부를 누릴 수도 있겠지만

글의 양심을 팔아서 유명해지고 싶은가 묻고 싶다.

여기저기 고료에 기웃거리다 짜고 친 고스톱에 재물이 되는 글쟁이....

신조도 자존심도 없이 글을 쓴다면 무슨 깊이의 시상이 떠오르며 명작이 나오겠는가!

무엇보다 글쟁이라면 소중한 문감이 훼손당하지 않아 한다고 생각한다.

서로 공감하는 감정의 건전한 교류와 글의 숭고한 문명을

겸손하게 지켜가는 문우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