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설경
가야산 설경 / 淸草배창호
설은 질어야 좋다는 말이 있다.
일기예보에는 전국이 눈과 혹한으로 결빙하여
곳곳에 교통대란과 한파에 몸살을 앓을 것이다 고 연일 예보하는 와중
구정 초에 큰 산의 대가람에 참배 차 순례하는 계획을 세웠으니
결빙으로 인한 찻길이 조금 망설여지는 것도 예외는 아닌 성 싶다.
남해안 일부에는 진눈깨비 대신하여 비를 조금 뿌렸으니 하룻길 나들이에는
그다지 심각하거나 염려스럽지 않았기에 이른 아침에 걱정 반 설렘 반하는 마음으로
임진년 정초의 첫 행보를 나섰다.
가야산 해인사는 정신적인 지주이며 영혼의 고향 같은 영적인 도량이라
내 육신이 노곤하고 심적으로 나약하여 위축할 때이면
본연本然으로 찾게 되는 져버릴 수 없는 인연이기에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습으로 채움하고 있는 정월의 나들이다.
합천을 지나 해인총림의 가야산자락에 다 달으니 밤새 내린 눈으로 쌓인
경내는 물론이고 온 산야가 하얗게 은색의 동화를 펼쳐주고 있다.
차편을 매표소에 두고서
하얀 목화솜 융단을 즈려밟으며 경내를 둘러보기로 작정하고
하산 길에는 새로 단장 된 소리 길을 염두에 두었기에 뽀드득,
은백색으로 한껏 채색한 별천지에 온 느낌이 눈이 부시고 가슴깊이
정화의 용틀임이 감동의 전율로 변하여 내 안을 막 헤집고 다닌다.
바람이 인다.
휘 늘어진 천년 홍송紅松 고목에 쌓인 송이 눈 뭉치가
한 줌 햇살에 섞여서 백설 가루되어 바람 빗살에 날리는 장관은
영판 태고의 신성하고 초연한 모습 같아서
폐부에서 우러난 아낌없는 찬사가 절로 토해진다.
억겁億劫으로 이어온 유유한 맥을
쉴 새 없이 담아 실어 보내는 홍류동 십리계곡의
너럭바위마다 소복소복한 눈 무덤이 올망졸망 무리 지움을 이루고
듬성듬성한 얼음구렁 사이로 맑디맑은 산 냇물이
내 여인의 사랑스런 조잘거림처럼 졸졸 끊임이 없다.
사계四季의 행락철과는 달리
고요와 정적에 쌓인 이 적요한 만상萬象이 참으로 질박하다.
오늘따라 고려 팔만대장경이 모셔진
해인사 장경각도 긴 겨울잠에 든 모습이다.
상풍한설霜楓寒雪이 살갗에 닿을 때면 한없이 차가울 것 같건마는
손으로 전해지는 그 온유함은
천년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깊은 명상인양
나를 품어 안아 주는 어머니의 품 안처럼
안식의 혜량을 쉼 없이 채울 수 있어 환희의 울림으로 전해진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가야산 봉우리,
셀 수 없는 풍상風霜의 세월이란 때를 입고서
나이조차 잊어버린 청송의 늘어진 가지에도 소복이 쌓였고
한 시대를 풍미 헸던 고사목에도 고드름처럼 상고대 피웠으니
해인海印 삼존불의 미소를 닮은
겨울 산수화의 진면목을 눈으로 배불리 감상하고
포만한 가슴으로 새하얀 눈 위에 오늘의 발자취를 도란도란 심으며
감사와 포용을 깨달음 하게끔 인연 짓게 하였으니
임진년의 첫발을 살갑게 디딤 할 수 있어 참으로 기쁨이고 행복이다.
깊은 산은 해가 일찍 떨어진다.
땅거미 일 무렵이면 눈보라일어 하산길이 다소 힘들게 하겠지만
가야산의 맑고 거룩한 정기를 소로시 담아가니
올 한해가 더 없는 아름다움의 연속이 될 것이다.
옛 선인의 덕과
지혜의 도량을 배움 할 수 있기를 한껏 소망해 본다.